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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스기 쓰나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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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에스기 쓰나노리는 1663년 기라 요시히사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664년 우에스기 쓰나카쓰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말기 양자 형식으로 우에스기 가문을 상속받았다. 2세의 나이에 가문을 이끌게 되었으며, 영지 삭감과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1675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로부터 이름을 하사받고, 1678년 도쿠가와 미쓰사다의 딸과 결혼했다. 1689년 기라 가문에 후계자가 없자 차남을 친가에 양자로 보내는 등 기라 가문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학문 진흥, 풍속 통제 등 문치 정치를 펼쳤으나 사치스러운 생활로 재정을 악화시켰고, 아코 사건 당시 소극적인 대처로 인해 가문의 명성이 추락했다. 1703년 은거 후 이듬해 사망했으며, 그의 시대에 우에스기 가문의 재정적 어려움은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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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스기 쓰나노리
기본 정보
우에스기 쓰나노리 초상 (봉대사 소장)
우에스기 쓰나노리 초상 (봉대사 소장)
씨명길라씨 → 우에스기씨
이름우에스기 쓰나노리
개명길라 산노스케 (유명) → 우에스기 가게요시 → 쓰나노리
별명기헤이지
시호없음
계명법림원전법인권대승도영심
묘소야마가타현요네자와시의 우에스기가 묘소
시대에도 시대 전기 - 중기
생년월일간분 3년 10월 28일 (1663년11월 27일)
사망일호에이 원년 6월 2일 (1704년7월 3일)
관직
관위종4위하, 시종, 탄정대필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이에쓰나쓰나요시
데와요네자와번주
가족 관계
부모아버지: 길라 요시오、어머니: 우에스기 도미코
양부우에스기 쓰나카쓰
형제자매쓰나노리、길라 사부로、학희(시마즈 쓰나타카 계실)、진희、아쿠리히메(쓰가루 마사타케 실)、국희(사카이 다다히라 실→오이노미카도 쓰네오토 실)
배우자정실: 도쿠가와 미쓰사다 딸・에이히메、측실: 이바라키씨、가시다씨
자녀요시노리、길라 요시카즈、우에스기 노리타카、가쓰치카、가쓰노부、도요히메(구로다 나가사다 정실)、그 외
양녀학희(시마즈 쓰나타카 계실)、아쿠리히메(쓰가루 마사타케 실)、국희(사카이 다다히라 실→오이노미카도 쓰네오토 실)
기타 정보
특징흥양관

2. 생애

간분 3년(1663년) 10월 28일, 기라 요시히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요네자와 번의 2대 번주 우에스기 사다카쓰의 넷째 딸인 우에스기 도미코이다. 1664년 윤 5월 10일, 요네자와 번의 3대 번주 우에스기 쓰나카쓰가 후사 없이 급사하자, 호시나 마사유키의 계책으로 쓰나노리가 우에스기 가문의 후계자가 되어 가문이 존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말기양자 상속의 대가로 영지가 30만 석에서 15만 석으로 삭감되어, 이후 우에스기 가문은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게 된다.

1675년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어전에서 원복식을 거행하고, 1678년 도쿠가와 미쓰사다의 딸 하루히메와 결혼하였다. 1681년 도쿠가와 쓰나요시로부터 유키미쓰의 칼을 하사받았다. 1689년 본가인 기라 가문에 후계자가 없어지자 둘째 아들을 기라 요시히사에게 양자로 보냈다.

쓰나노리는 번을 다스리면서 교육 발전, 풍속 단속, 관직 정비, 역사 편찬 등 문치 정치에 힘썼다. 1697년 학문소를 건설하고, 우에스기 겐신우에스기 가게카쓰의 연보를 완성시켰다. 그러나 건설 사업과 산킨코타이의 사치로 인해 번의 재정이 더욱 악화되었다.

1701년 아사노 나가노리기라 요시히사에게 부상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하고, 1702년 아코 사건이 발생하였다. 쓰나노리는 원군을 보내려 했으나, 막부의 명령으로 중지하였다. 이 일로 우에스기 가문의 명성은 추락하였다.

1703년 병으로 은거하여 아들 우에스기 요시노리에게 가문을 계승하게 하였고, 1704년 4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2. 1. 가문 상속과 초기 통치

간분 3년(1663년) 10월 28일, 기라 요시히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요네자와 번의 2대 번주 우에스기 사다카쓰의 넷째 딸인 우에스기 도미코이다.[6] 간분 4년(1664년) 윤5월 10일, 요네자와 번의 3대 번주 우에스기 쓰나카쓰가 후사 없이 급사하자, 우에스기 가문과 요네자와 번은 소멸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호시나 마사유키의 계책으로 요시히사와 도미코 사이의 갓 태어난 아이 산노스케를 후계자로 하여 가문의 존속을 허락받았다. 산노스케는 '우에스기 기헤이지 가게노리(上杉喜平次景倫일본어)'라 이름을 바꾸었다. 6월 5일, 정식으로 우에스기 가문의 당주가 되었는데, 당시 2세였던 그를 다케마타 요시히데와 나카조 도모스케(中条知資일본어) 등이 보좌하였다. 그러나 말기양자에 의한 상속의 대가로 영지 30만 석 중 절반인 15만 석이 삭감되어, 시노부 군, 다테군을 몰수당하면서 우에스기 번 영지는 오키타마 군만이 남았다. 이후 우에스기 가문은 심각한 재정 핍박에 시달리게 된다.[6]

7월 11일, 연소한 기헤이지를 대신하여 가신들이 사례하기 위하여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에게 나아가 선물을 헌상했다. 간분 8년(1668년) 8월 25일, 기헤이지 자신이 비로소 쇼군을 알현하였고, 엔포 3년(1675년) 11월 23일에는 쇼군 이에쓰나의 어전에서 원복식을 거행하고, 이에쓰나(家綱일본어)의 편휘를 받아 쓰나노리(綱憲일본어)로 개명하고, 종4위하, 시종, 단조다이히쓰(弾正大弼일본어)에 서임되었다. 이름은 가게카쓰, 사다카쓰, 쓰나카쓰와 같이 3대에 걸쳐 통자화되었던 "勝" 자가 아닌, 옛 우에스기 씨의 통자였던 "憲" 자를 사용했다. 쓰나노리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글자를 사용하는 당주가 많이 보인다. "勝" 자는 넷째 아들인 가쓰치카를 시조로 하는 닛타 우에스기 씨에게 계승되었다.[6] 엔포 6년(1678년), 고산케의 하나인 기이 번주 도쿠가와 미쓰사다의 딸 하루히메(栄姫일본어)와 결혼하였다. 엔포 7년(1679년) 4월 21일, 처음으로 봉지 요네자와에 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덴나 원년(1681년) 4월 19일, 신임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로부터 유키미쓰의 칼(行光の刀일본어)을 하사받았다. 겐로쿠 2년(1689년) 11월, 원래 본가인 기라 가문에 후계자가 없어지자, 둘째 아들 하루치요(春千代일본어, 훗날의 기라 요시치카)를 친아버지 요시히사에게 양자로 보냈다. 이러한 이중 삼중의 친척 관계로 인해 기라 가문과 우에스기 가문은 더욱 친밀한 관계가 되었고, 기라 가문에서 소비하는 돈을 우에스기 가문에서 원조하거나 보태는 등의 일도 잦아졌다.[6]

2. 2. 혼인과 기라 가문과의 관계

엔포 6년(1678년), 고산케 중 하나인 기이 번주 도쿠가와 미쓰사다의 딸 에이히메(栄姫|에이히메일본어)와 결혼하였다. 겐로쿠 2년(1689년) 11월, 본가인 기라 가문에 후계자가 없어지자, 둘째 아들 하루치요(春千代|하루치요일본어, 훗날의 기라 요시치카)를 친아버지 요시히사에게 양자로 보냈다. 이러한 이중 삼중의 친척 관계로 인해 기라 가문과 우에스기 가문은 더욱 친밀한 관계가 되었고, 기라 가문에서 소비하는 돈을 우에스기 가문에서 원조하거나 보태는 일도 잦아졌다.

2. 3. 번정 개혁과 문화 진흥

쓰나노리는 번을 다스리면서 교육을 발전시키고, 풍속을 단속하며, 관직을 정비하고, 역사를 편찬하는 등 문치(文治) 정치에 힘썼다. 풍기 단속은 엄격하여, 쓰나노리가 다스리는 동안 가문 내 부정으로 후다이(譜代|후다이일본어) 가신들이 추방되는 경우가 많았고, 1683년에는 영지 내에서 도박을 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공표했다.[8]

1692년에는 다른 영지와의 경계에 세워진 5개소의 진야 성주 대행을 '역옥장(役屋將)'으로 고쳤다.[9]

1697년 6월 15일, 요네자와 번 학관의 시초가 되는 성당, 학문소를 번의 유학자 겸 의사인 야오이타 산인의 집에 건설하고,[10] 성당 편액을 '감린전(感麟殿|감린전일본어)'이라 하였다.[11] 또한 우에스기 겐신우에스기 가게카쓰의 연보를 완성시켰다.

그러나 1698년 6월, 시오노 비사문당(塩野毘沙門堂|시오노 비사문도일본어)과 젠린 사(禅林寺|젠린지일본어)의 문수당(文殊堂|문수도일본어) 등 신사와 사찰을 크게 수리하고, 앞서 말한 학문소와 요네자와 성 혼마루 고쇼인(御書院|어서원일본어), 니노마루의 고부타이(御舞台|어무대일본어), 아자부의 저택 신축 등 건설 사업과 산킨코타이를 화려하게 하였고, 호화로운 공연을 하는 등의 사치로 인해, 영지 감소로 어려워진 번의 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 때문에 번의 군용 자금을 일반 재정에 사용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런 재정 상태로 기라 가문을 원조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쓰나노리의 번정은 교육 진흥, 풍속 통제, 관직 정비, 역사 편찬 등 문치 정치에 힘쓴 덕분에 7가 소동에서 센자카 다카아쓰 등이 우에스기 하루노리 등의 개혁을 비판할 때, "풍속도 좋고, 정치도 좋다"라며 쓰나노리의 치세를 평가받았다.

2. 4. 아코 사건과 우에스기 가문의 위기

겐로쿠 14년(1701년) 3월 14일, 에도 성 내에서 아코번아사노 나가노리기라 요시히사에게 부상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이후 쓰나노리는 친어머니 도미코를 저택으로 모셨다. 이듬해인 15년(1702년) 12월 14일, 아코 번의 번사들이 기라의 저택을 습격하는 아코 사건이 발생했다.[1] 이때 쓰나노리는 아버지에게 원군을 보내려 하였으나, 하타케야마 요시야스가 로주로부터 출병 중지 명령을 전달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지하였다.[1] 하지만 이 사정을 모르는 일반 서민들은 아코 번사들의 침입 이후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은 요네자와 번의 태도를 비난했고, 우에스기 겐신 이래로 이어져온 우에스기 가문의 명성은 추락했다.[1]

『충신장』을 소재로 한 드라마 등에서는, 아버지(우에스기 쓰나카쓰)를 위해 원군을 보내려 하는 쓰나노리에 대해, 가신으로 닌자나 구노이치를 사용하는 이로베 야스나가 또는 야마가류의 달인으로 '고양이 효부'라고 불리는 지사카 다카후사가 이를 만류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그러나 이로베 야스나가는 실제 아버지의 기일로 우에스기 가문에 출사하지 않았고, 지사카 다카후사는 2년 전에 이미 사망했다. 이 날 쓰나노리를 막은 것은 가신이 아니라, 막부 로주로부터의 출병 중지 명령을 쓰나노리에게 전달하기 위해 우에스기 저택으로 찾아온, 먼 친척인 고케・하타케야마 요시야스였다.[1]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서민들은, 공격을 감행한 아코 낭사를 의사로 추켜세우는 한편, 공격 이후 행동을 취하지 않은 요네자와 번의 태도를 한심하게 여겼다는 연출이 있다. 그 때문에 우에스기 겐신 이래의 무가의 명성은 땅에 떨어져, 에도 시내에는 "우에스기의 에타(枝, 가지)를 내려 술을 마시고, 무사는 되지 말고, 마을 사람이 되어라", "가게토라(겐신)도 이제 고양이가 되었나, 나가오 (겐신의 친가)를 이끌고 지도 못하네" 등과 같은 낙서가 대량으로 붙여졌다는 이야기도 있다.[1]

하지만, 이것은 1765년(메이와 2년)의 『히후류타류』에 있는 것으로 사건으로부터 60년이나 경과했다. 또한, 『겐로쿠 쾌거록』, 『아코 의사 일석화』에는 "에도의 시민들이 철수하는 아코 의사를 보고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

한편 공격 사건은, 쓰나노리 한 사람에게는 중요한 옛집의 위기였지만, 번사에게는 타가의 실수로 받아들여졌을 뿐이었다. 결국, 자번을 단절의 위기로 몰아넣는 행동에는 아무도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출병하지 않는 것은 "자발적인 행동"으로 외부에서 보일 정도로, 막부의 명령은 번사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1]

2. 5. 은거와 죽음

1703년(겐로쿠 16년) 8월 21일, 병 때문에 은거하면서 적자인 우에스기 요시노리에게 가문을 계승하게 하였다. 그 후 9월 14일,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에게 라이쿠니토시의 와키자시와 목계 필의 쌍폭을, 오다이도코로 다카쓰카사 노부코에게 니조 타메우지 필의 "고킨와카집"을, 쇼군 생모 게이쇼인에게 니조 타메시게 필의 "고킨와카집"을 각각 헌상했다.[1]

이듬해인 1704년(호에이 원년) 6월 2일, 4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어머니 도미코는 같은 해 8월 2일에 사망했다. 영지인 요네자와 고묘에 묻혔다.[1]

그 후, 우에스기 가문의 재정 압박은 심각해져 재건은 증손에 해당하는 우에스기 요잔의 번정 개혁을 기다리게 된다.[1]

3. 평가

우에스기 쓰나노리는 교학 진흥, 풍속 통제, 역직 정비, 역사 편찬 등 문치 정치에 힘썼다. 그러나 지나치게 엄격한 풍기 단속, 신사, 사찰 대수리, 요네자와 성 혼마루 고쇼인, 니노마루의 고부타이, 아자부 저택 신축 등 건설 사업, 산킨코타이의 사치, 호화로운 예능 등으로 영지 감소로 어려워진 번의 재정을 더욱 악화시켰고, 기라 가문을 원조하면서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1]

3. 1. 부정적 평가

쓰나노리는 교학 진흥, 풍속 통제, 역직 정비, 역사 편찬 등 문치 정치에 힘썼다. 풍기 단속은 엄벌로 다스렸고, 쓰나노리의 치세 동안 집안의 부정으로 후다이 가신들이 추방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덴나 3년(1683년)에는 영내에 도박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공포했다.[1]

그러나 겐로쿠 11년(1698년) 시오노 비사문당과 젠린 사의 문수당 등 신사, 사찰 대수리, 학문소와 요네자와 성 혼마루 고쇼인, 니노마루의 고부타이, 아자부 저택 신축 등 건설 사업, 산킨코타이의 사치, 호화로운 예능 등으로 영지 감소로 어려워진 번의 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 때문에 번의 군용 자금을 일반 재정에 유용했고, 기라 가문을 원조하면서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1]

4.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기라 요시히사
어머니우에스기 도미코 (우에스기 사다카쓰의 넷째 딸)
양아버지우에스기 쓰나카쓰
정실에이히메 (기슈번도쿠가와 미쓰사다의 딸,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누나)
측실이바라키 씨 (오요노카타, 세이쥬인)
장남우에스기 요시노리 (제5대 번주)
차남키라 요시치카 (키라 요시히사의 양자로 들어가 뒤를 이음. 아코 낭사의 습격 이후 개역됨)
측실카시다 씨 (오이소)
삼남우에스기 노리타카 (겐로쿠|겐로쿠일본어 5년 5월 22일 (구력)|5월 22일일본어 (1692년 7월 6일) - 호에이|호에이일본어 5년 11월 24일 (구력)|11월 24일일본어 (1709년 1월 4일)), 통칭 주전. "간세이 정수 제씨보"에서는 호에이|호에이일본어 5년에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에게 어전알현했지만, 그 해에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고 한다.
사남우에스기 카츠치카 (요네자와 신덴번의 초대 번주)
오남우에스기 카츠노부
토요히메 (즈이요인) (아키즈키번주 쿠로다 나가사다의 정실, 요네자와번 제9대 번주 우에스기 하루노리의 조모)


참조

[1] 문서 上杉家時代の仮名 (通称)。
[2] 문서 阿久理とも。
[3] 문서 早世
[4] 문서 いずれも父・吉良義央の娘。
[5] 문서 このため、大炊御門家・一条家の現当主は吉良義央の九世子孫にあたる。
[6] 간행물 米沢藩士市河家による系図作成 山梨県立博物館 2011
[7] 간행물 不識院御堂と謙信の神格化 高志書院 2017
[8] 문서 館山城 (出羽国)は幕府提出絵図や藩の記録に「城山」「古城」などと記載がある(平成28年3月1日文部科学省告示第26号)
[9] 문서 「上杉家御年譜」(米沢温故会) に「元禄五年(1692)中山御役屋と改称」と記される。
[10] 문서 一時閉鎖されるが、後に片山一積の私塾を改築し、興譲館 (米沢藩)と改称して再興した。現山形県立米沢興譲館高等学校。
[11] 문서 後に上杉治憲により「先聖殿」と改称された。
[12] 서적 元禄快挙録
[13] 서적 赤穂義士一夕話
[14] 문서 上杉博物館 開館20周年記念企画展「上杉家伝来能面・能装束-語りはじめた面袋-」(2021年10月16日~12月8日) 2021-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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